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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4일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중 제3장과 제4장을 (다시) 읽고.

1. 메스로 환자의 배를 가르고 잘라내야 할 부위를 찾는다. 조심스럽게 소장을 들춰내자 곪은 부위가 눈에 띈다. 나직한 목소리로 “가위”하며 의사는 장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간호사 쪽으로 손을 내민다. 간호사가 가위를 건넨다. 의사는 날카로운 수술용 가위로 소장을 삭둑 잘라낸다. 날카로운 가위날에 의해 소장이 잘려나가는 그 절삭감은 의사의 손에 <그대로> 전달됐다. 이상 수술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짧게 스케치해보았다. 하루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천 수만 건씩 벌어지는 이런 수술 장면은 마이클 폴라니(1891~1976)가 자신의 <인식론>을 구축하며 제시한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폴라니는 상기 수술실에서 의사가 경험하는 인식의 종류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잘라내야 할 <장기에 대한> 인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장기를 자르는 <가위에 대한> 인식인데 , 폴라니에 따르면, 의사는 장기는 초점적(focal)으로 인식하고, 가위는 부차적(subsidiary)으로 인식한다.

2. 이런 <초점적-부차적 인식>의 이중구조는 실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망치로 못을 박을 때 망치를 쥔 손바닥에 전해지는 정보를 통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건 벽에 박히(고 있)는 못의 상태이지, 현재 쥐고 있는 망치 손잡이의 질감이 아니다. 우리는 못을 초점적으로 인식하고 망치의 손잡이를 부차적으로 인식한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짚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팡이의 손잡이는 부차적으로, 지팡이 끝을 통해 전달되는 지표면의 상황은 초점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만약 상기 두 경우에서 초점적-부차적 인식 대상을 서로 뒤바꾸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즉, 망치 손잡이와 지팡이 손잡이를 부차적이 아니라 초점적으로 인식하고, 못과 지표면을 초점적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인식하려 한다면? 의사가 수술실에서 장기를 부차적으로, 가위를 초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면? 못질은 빗나가고, 걸음걸이는 불안해지고, 장기는 제대로 절삭되지 못한다..

3. 폴라니는 여기서 우리가 가위를 초점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의사가 가위의 성능을 의심하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 즉, 초점적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 결함을 발견하여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나 폴라니가 여기서 부각시키고 있는 점은, 의사가 환자의 장기를 초점적으로 인식하며 절삭이라는 의미있는 행동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부차적 인식 대상인 가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은『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 지음, IVP)에서 마이클 폴라니의 인식론을 소개하면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제대로 집어내고 있다. (1) 의사들은 학생시절 수많은 의료 기구들의 사용법을 배우는데 “처음 배웠을 때에는 그 기구에 온통 신경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련된 외과 의사가 된 다음에는 그것을 <암묵적으로> 의식할 뿐이고, 의식의 초점은 그것을 통해 발견하는 것에 맞추어질 것이다”. (2) 한편 의사가 가위를 “사용하고 있는 동안은 그 기구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그것이 적절한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것을 버리고 다른 기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한 그것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을 신뢰하는 동시에 의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그것을 <무비판적>(a-critical)으로 사용한다. (p.74~75에서 인용했고 꺽쇠는 내가 첨가했다.)

4.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불기시작한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잠시 언급하자면 이렇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세계관’을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초점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하나 <의미있는 대화>는 자신의 ‘기독교세계관’조차도 <부차적>으로, <암묵적>으로 취급하면서, 오직 상대와 그리고 세상과 나누는 이야기를 <초점적으로> 주목할 때 - 그런 모험(?)을 감수할 때 - 비로서 가능하다. 그 순간은, 내가 나의 ‘기독교세계관’과 상대의 ‘비-기독교세계관’에 무비판적(a-critical)이 되는 순간이다. <이야기에만 주목하는 순간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무비판적인 순간에 내 기독교가 상대의 비기독교에 의해 <오염>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이미 <완벽한 안전을 제공하는 인식론적 방법론이 있다는 환상에 오염된 생각>이라고 본다.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어떤 오염은 <어떤 성숙>이다.

서플먼트

1) 나는 위에서 마이클 폴라니의 방대한 사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념 중 하나를 간략하게 <스케치>했다. 다시 읽어보니 스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캐리커처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를 읽었으면 하는 마음 못지않게 내 속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폴라니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천구백 년대에 태어난 현대인의 어리석은 교만이었겠지만 난 한때 천팔백 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오래됐다고’ 무시하고 깔봤다. C.S.루이스(1898~1963)와 마이클 폴라니(1891~1976)를 읽으며 나의 이런 교만이 깨졌다. 

2) 폴라니의 책 가운데 세 권이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지적 자유와 의미』(Meaning),『과학,신념,사회』(Science,Faith,And Society) - 세 번역본 모두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서를 모두 읽었으되 이해를 할 수 없어 다시 영어로 읽은 경험이 있다.) 폴라니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추천하는 순서는 이렇다. 먼저 레슬리 뉴비긴의『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제3장과 제4장을 읽은 뒤에 영문판 『Meaning』을 읽기. 그의 주저 『개인적 지식』은 입문자가 읽기에는 벅차다. 『Meaning』은 폴라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인데 언어, 예술, 종교, 과학, 사회에 대한 그의 방대한 사상이 잘 요약돼 있다. 13장으로 이뤄져 있고 난 13번의 절정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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